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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겨울 수성못의 전설과 ‘군고구마 연정’

멍하게 2026. 6. 4. 09:10

[대구 수성못]

대구 수성못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대구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데이트 장소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규모 상업시설이 많지 않아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연인들이 보트장을 찾고 호숫가 산책을 즐겼다. 밤이면 네온사인과 음악다방, 호프집 분위기가 어우러져 젊은 층이 많이 모였고, 주변 유원지와 놀이시설도 지역 명소 역할을 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겨울 데이트의 성지이자 낭만의 결정체는

단연 ‘수성못’이었다.

 

찬 바람이 몰아치면

수성못 둑길은 거대한 천연 냉동고처럼 변했지만,

 

사랑에 눈이 먼 청춘들에게

그 정도 추위는 주윤발의 바바리코트 자락 하나로 막아낼 수 있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사건은 기말고사가 끝난 눈 내리는 금요일 오후,

덕구가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만화방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야, 대박이다!

영자가 오늘 시험 끝나고

친구들하고 수성못 둑길에

군고구마 묵으러 간다 카대!

 

오늘이야말로 내 넓은 어깨로

영자의 추위를 녹여줄 타이밍이다!”

 

덕구의 외침에 철수는

집에서 아버지가 입으시던

진짜 외제 모직 코트를 몰래 훔쳐 입고 나왔고,

 

우리 5인방은 각자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겨울 멋’을 부린 채

수성못으로 향했다.


1. 수성못의 칼바람과 바바리 가오

 

수성못에 도착하자마자

대구 특유의 매서운 겨울 칼바람이

우리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장국영의 핏줄을 자처하는

우리 독수리 5형제는

가슴을 팍 펴고 둑길을 걸었다.

 

무리 중 유일하게 외제 코트를 입은 철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여유를 부렸고,

 

나는 시장통 ‘나이스’ 운동화 안으로

스며드는 한기를 참으며 발가락을 웅크렸다.

 

늘 앞코가 터져 있던 상구의 ‘까발로’는

오늘따라 유독 애처로워 보였다.

 

상구의 양말 빵꾸 사이로

비져나온 엄지발가락이

대구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동상 걸리는 거 아이가?

뼈가 와 이리 시리노.”

 

광팔이가 걱정스레 묻자,

상구는 무심하게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괘안타. 고구마 냄새 나네. 저기다.”


2. 드럼통 난로와 군고구마 아저씨

 

저 멀리 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드럼통 군고구마 리어카가 보였고, 그 앞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던 ‘수성구 장만옥’ 영자가 친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영자는 귀여운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호호 불며 군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하이틴 잡지 표지 모델 같았다.

“영자야! 주말에 수성못에서 만나다니, 이건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다!”

덕구가 코트를 휘날리며 영자 앞으로 슬라이딩하듯 다가갔다. 하지만 얼어붙은 둑길 바닥을 간과한 탓에, 덕구는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군고구마 드럼통 난로 쪽으로 고꾸라졌다.

“어어? 덕구야 잡으라!”


3. 까발로의 구원 투수와 고구마 폭탄

 

뒤에서 지켜보던 상구가

급한 마음에 발을 뻗어 덕구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덕구는 겨우 드럼통에 부딪히는 대참사는 면했지만,

 

그 반동으로 상구의 터진 ‘까발로’ 앞코가

드럼통 밑바닥의 연탄 집게를 툭 건드리고 말았다.

 

콰당탕-!

 

드럼통 위에 예쁘게 구워져 올려져 있던

숯검댕이 군고구마 수십 개가

낙엽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으악! 고구마 비가 내린다!”

 

광팔이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공중에서 떨어진 잘 익은 군고구마 한 개가

철수가 몰래 입고 나온 아버지의 외제 명품 모직 코트의 깃 위에

정확하게 안착했다.

 

뜨겁고 노란 고구마 속살이

검은색 고급 원단에

마치 한 폭의 추상화처럼

뭉개지며 처참하게 번져갔다.

 

“악!! 내 코트!!

이거 우리 아부지 전재산 1호인데!!”

철수의 비명이

수성못 전역에 울려 퍼졌다.


4. 빨간 목도리의 온기와 덕구의 눈물

 

매점 앞은 순식간에 흩어진 고구마와 연탄재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군고구마 아저씨는

굵은 경상도 사투리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 문둥이 고딩 자슥들이

어디서 영업방해고! 당장 안 가나!”

 

우리가 혼비백산하여

고구마 값을 물어주며 수습하는 사이,

 

영자가 다가와

철수의 코트에 묻은 고구마 껍질을 털어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니들 은 언제쯤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있노...

맨날 와 이리 우당탕탕이고.”

 

영자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스윽 풀어

얼굴이 얼어붙은 덕구의 목에 대충 칭칭 감아주었다.

 

“덕구 니는 코까지 빨개졌다.

감기 걸리라, 캐서 이거라도 하고 가라.”

 

영자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목에 따뜻한 영자의 온기를 수여받은

덕구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야... 장만옥이 나한테 마음을 준 기라...

내 평생 이 목도리 안 빨 끼다!”


5. 얼어붙은 수성못 위에서 다짐한 청춘

 

결국 철수는 코트에 묻은

노란 고구마 얼룩을 지우느라

 

주머니에 있던 전 재산을 털어

동성로 세탁소로 달려가야 했고,

 

우리는 남은 찌그러진 군고구마 두 개를

둑길 벤치에 앉아 5등분으로 공평하게 나눠 먹었다.

 

바람은 불고 손은 시려 터질 것 같았지만,

영자의 빨간 목도리를 감은

덕구를 중심으로 우리는

어깨를 밀착한 채 낄낄거렸다.

 

“야, 철수야. 니 코트에서 구수한 냄새 난다.

겨울 한정판 고구마 에디션이네!”

 

광팔이의 깐족거림에

철수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스름해진 겨울 밤,

얼어붙은 수성못 표면 위로

대구 시내의 야경이 은은하게 반사되던 그 시간.

 

비록 우리는 가진 것 없고

신발 앞코마저 터진 촌스러운 고딩들이었지만,

 

친구의 어깨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입안 가득 고소했던 군고구마의 맛 하나만으로도

세상 그 어떤 부자보다 마음만큼은 뜨거웠던,

1988년 우리들의 찬란한 겨울날이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드럼통 군고구마 : 80년대 겨울철 길거리의 대표 간식. 뜨거운 고구마를 양손으로 번갈아 쥐며 호호 불어 먹던 재미와, 다 먹고 난 뒤 입가에 묻은 검은 숯검댕이는 그 시절 겨울의 훈장이었다.
  • 빨간 목도리 : 당시 여학생들의 겨울 필수 아이템이자 남고생들의 마음을 흔들던 순정의 오브제. 칭칭 감은 목도리 하나면 매서운 대구 칼바람도 봄바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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