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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어린이회관 잔디밭과 전설의 ‘야외 기차 탈출기’

멍하게 2026. 6. 10. 22:01

[대구 어린이회관]

대구 어린이회관(현 대구어린이세상)은 1980년대 후반 대구 수성구 황금동에 위치하여, 당시 고딩들에게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최고의 ‘가성비 데이트 코스’이자 휴식처였습니다. 넓고 푸른 잔디밭과 야외 음악당, 그리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야외 기차와 꾀꼬리극장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아 주말이면 수많은 청춘들이 모여들곤 했습니다. 특히 입장료가 없거나 매우 저렴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남고생들이 대구여고 여학생들과 가벼운 피크닉을 기획할 때 무조건 1순위로 손꼽히던, 그 시절 대구 청춘들의 소박하고 푸르던 아지트였습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수성구 황금동의 ‘어린이회관’은
이름과 달리 어린이들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지독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고딩들이
단돈 몇 백 원의 차비만 들고 찾아가
넓은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던,
도심 속 몇 안 되는 낭만의 쉼터였다.
 
주말이면 교복을 벗어던진 남고생들과 여고생들이
뻐꾸기 보온도시락에 사이다를 들고 모여들어
풋풋한 눈빛을 교환하던 밀회의 장이기도 했다.
 
사건은 아까시나무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던 5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덕구가 만화방 문을 부서져라 열고 들어오며 시작되었다.
 
“야! 대구여고 영자가 오늘 친구들하고 어린이회관 야외 기차 타러 온단다!
오늘이야말로 내 넓은 어깨로 기차 안에서
영자를 에스코트하며 로맨틱한 영화 한 편 찍을 끼다!”


1. 황금동 언덕길과 독수리들의 ‘봄철 사복 패션’

우리는 덕구의 원대한 가오에 동참하기 위해
어린이회관 언덕길을 올랐다.
 
철수는 오늘도 아버지가 서울 출장길에 사다 주신
백색 ‘프로스펙스’ 단화를 신고 여유롭게 앞장섰고,
 
나와 광팔이는 짝퉁 ‘나이스’의 체크 마크가 유독 도드라져 보일까 봐
발걸음을 슬쩍슬쩍 숨겼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의 가장 큰 시한폭탄은 상구의 ‘까발로’였다.
 
나름 피크닉 분위기를 내겠다고 상구는
동생의 유치원 소풍 가방 같은 샛노란 배낭을 매고 왔는데,
 
그 아래로 여전히 앞코가 뻥 뚫려
엄지발가락이 마중 나와 있는 까발로 운동화의 조합은
그야말로 어린이회관 전체에서 독보적인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어린이회관에 정기권 끊었나?
와 자꾸 신발 밖으로 마중을 나와서 인사를 하고 카노.
발 좀 오므려라!”
 
광팔이가 호통을 쳤지만,
상구는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회관 앞 솜사탕 냄새 좋네”라며 코만 킁킁거렸다.


2. 꾀꼬리극장 옆 야외 기차와 장만옥의 미소

우리는 마침내 어린이회관의 명물인
야외 미니 기차 탑승장에 도착했다.
 
과연 덕구의 첩보대로,
저 멀리 아기자기한 철길 위에서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친구와 함께 줄을 서서 솜사탕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봄볕을 받아 반짝이는 단발머리와 하얀 블라우스는
흡사 홍콩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이 부셨다.
 
“철수야! 당장 저 뒤편 칸 승선권을 끊어라! 추격 개시다!”
 
덕구는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기차 표를 끊더니,
영자가 탑승한 바로 뒷 칸에 우리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주방 터진 청바지와 일청담 입수 소동의 패배를 만회하겠다는 듯,
덕구는 자리에 앉아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장국영처럼 멋지게 소리쳤다.
 
“헤이, 영자! 봄바람을 가르는 미니 기차 위에서 조우하다니, 이건 기하학적으로 운명이다!”


3. 미니 기차의 폭주와 까발로의 역습

“덜컹덜컹—”
 
경쾌한 기적 소리와 함께
미니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가 어린이회관 숲길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달릴 때,
영자가 뒤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덕구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기차 난간을 붙잡고 가오를 잡았다. 기선제압은 성공적이었다.
 
사건은 기차가 작은 터널 구간을 통과해
급커브를 돌며 속도를 줄이던 순간 터졌다.
 
뒤 칸에 앉아 있던 상구가 “야, 저기 다람쥐 있다”라며
흥분해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그만 터진 ‘까발로’ 앞코 구멍 사이로 비져나와 있던 엄지발가락이
앞 칸과 뒤 칸을 연결하던 쇠고리 핀 사이에 꽉 끼어버린 것이다.
 
“악!! 내 발가락!! 끼였다!!”
 
상구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거구를 뒤로 확 제치는 순간,
연결 고리가 비정상적인 힘을 받으며 ‘팅—!’ 소리와 함께 풀어져 버렸다.


4. 분리된 객차와 터널 속의 아수라 백작

“어… 어어? 와 이리 멀어지노!”
 
영자가 탄 앞 칸은 기관차를 따라 앞으로 쭉 빠져나갔고,
우리가 탄 뒤 칸은 동력을 잃은 채
완만한 오르막길 철로 위에서 서서히 멈추더니
이내 뒤로 스르륵 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으악! 기차가 후진한다! 다 비켜라!!”
 
방향을 잃고 역주행하는 우리 객차는
철로 끝에 있던 안전 범퍼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쾅-! 탈탈탈-!
 
범퍼에 부딪힘과 동시에 객차가 크게 요동치며,
맨 앞에 서서 영자를 향해 손을 흔들던 덕구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하필이면 그 순간, 탑승장 옆 매점 아주머니가 진열해 두었던
거대한 ‘핑크색 솜사탕 나무’ 위로 덕구가 정확하게 다이빙을 했다.
 
부스럭- 찌적-!
 
뜨거운 봄볕에 살짝 녹아내려 끈적하던 수십 개의 분홍색 솜사탕들이
덕구의 얼굴과 새로 빌려 입은 청자켓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덕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고 분홍빛 털로 뒤덮여,
흡사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나 솜사탕 괴물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5. 솜사탕 괴물과 장만옥의 실종

“꺄아악! 이게 뭐야!
덕구 얼굴이 와 저래 부풀어 올랐노!”
 
미니 기차에서 내려 달려온 영자와 친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회관 관리실 아저씨는 메가폰을 잡고 대구 사투리로 사자후를 토해냈다.
“거기 솜사탕 다 터뜨리고 누워있는 문둥이 고딩 자슥들!
당장 일어서라! 너희 오늘 다 죽었다!”
 
덕구는 입안으로 들어간 달콤한 설탕 가닥을 뱉어내며
“영... 영자야! 내 마음은 진심이다!”라고 외쳤지만,
 
온 얼굴에 분홍색 끈적이를 묻힌 채 솜사탕 나무를 안고 있는
덕구의 몰골은 그야말로 안쓰러움의 극치였다.
 
영자는 차마 눈을 뜨고 못 보겠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덕구 니는 진짜 어린이회관이 아이고 정신병원에 가야 대는 거 아이가...”라며
친구들의 손을 잡고 범어동 방향 정문 쪽으로 서둘러 도망쳐버렸다.


6. 황금동 분식집 앞과 우리들의 푸른 봄

결국 우리는 매점 아주머니에게
솜사탕 스무 개 값을 눈물겹게 변상한 뒤,
 
얼굴과 옷이 온통 끈적거려 개미들이 꼬이기 시작한 덕구를 끌고
어린이회관 뒷길 허름한 분식집 평상 아래로 피신해야 했다.
 
덕구의 머리카락은 분홍색 설탕물로 딱딱하게 굳어
힙합 가수처럼 삐죽하게 솟구쳐 있었고,
 
상구의 까발로는 쇠고리에 찍혀 앞코 구멍이 두 배로 넓어져 있었다.
 
우리는 주머니 속 10원짜리 동전까지 탈탈 털어 주문한
150원짜리 컵 사이다 한 잔을
다섯이서 빨대 여러 개를 꽂아 나눠 마시며 덕구를 위로했다.
 
“야, 덕구야. 그래도 머리가 분홍색으로 굳으니까
꼭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폭탄 맞고 머리 터진 악당 같고 가오는 사네.”
 
광팔이의 짓궂은 농담에 철수가 얼음조각을 입에 넣어주며 덧붙였다.
 
“다음 주엔 진짜 학교 운동장에서 얌전하게 축구나 하자, 이 문둥이 자슥아.”
 
 
비록 영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남고생의 호기기 가득한 기차 데이트는
솜사탕 대참사로 처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아까시나무 꽃바람에 실려 오던 달콤한 향기와
혀끝에 남았던 사이다의 청량함은
우리들의 서투르고 찬란했던 고교 시절의 한 페이지로 푸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어린이회관 미니 기차 : 80~90년대 대구 어린이회관 야외 광장을 크게 한 바퀴 돌던 최고의 명물 놀이기구. 느릿느릿한 속도였지만, 숲길을 지나가는 아기자기한 코스 덕분에 청춘들의 숨은 데이트 명소이기도 했다.
  • 솜사탕 나무 : 유원지나 회관 앞에서 아저씨들이 커다란 나무 막대에 구름 같은 솜사탕을 수십 개씩 꽂아두고 팔던 추억의 비주얼. 보기만 해도 설레지만, 가끔 무모한 고딩들이 부딪치면 끈적한 재앙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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