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2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장국영과 ‘판치기’의 제왕

멍하게 2026. 5. 24. 10:52
[판치기] 

1980년대 후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편이나 복도에서 ‘판치기’ 놀이가 유행했다. 딱지처럼 두꺼운 종이나 연습장 표지를 접어 만든 판을 바닥에 내려쳐 상대 판을 뒤집거나 밀어내는 방식이었는데, 힘 조절과 손목 스냅이 중요했다. 학생들은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나 과자 상자 종이로 직접 판을 만들었고, 판을 많이 따면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수업 종이 울릴 때까지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던 당시 교실 풍경의 한 모습이었다.

 

 

1. 책받침 하나에도 계급이 있던 시절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밀크책받침’은

단순한 문구용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이틴 스타를 향한 팬심의 결정체이자,

쉬는 시간 교실 뒷바닥에서 벌어지는 거대 자본주의 시장,

즉 ‘판치기’의 핵심 장비였다.


2. 광팔이와 장국영의 등장

 

사건은 우리 5인방 중 손기술이 제일 좋았던

광팔이가 장국영이 그려진 ‘코팅 책받침’을 새로 장만하면서 시작됐다.

 

“야, 이거 봐라. 이번에 동성로 문방구에서 새로 나온 건데,

표면이 억수로 미끄러워서 동전이 지 알아서 날아다닌다.

오늘 내 이걸로 니들 코 묻은 돈 싹 다 긁어모을 끼다!”

 

광팔이는 책받침을 소중하게 닦으며 장국영의 콧날을 어루만졌다.

판치기에서 책받침의 탄성은 승패를 결정짓는 절대적 요소였다.

 

우리는 교실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10원짜리 동전을 쌓아 올렸다.


3. 장국영의 기운을 받은 판치기

 

“자, 영웅본색 가자! 팍!”

광팔이가 책받침을 바닥에 내리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장국영의 기운을 받았는지

동전 5개가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더니 전부 ‘뒷면’으로 뒤집어진 것이다.

 

“아싸! 싹쓸이!”

 

광팔이가 미친 듯이 동전을 챙기던 그때,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미친개’ 학생부 선생님이 등장했다.

 

“이 문둥이 자슥들,

공부하라고 사준 책받침으로 도박판을 벌여?

다 일로 와!”


4. 담장을 넘지 못한 장국영

 

우리 5인방은 혼비백산하여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광팔이는 끝까지 장국영 책받침을 포기하지 못했다.

 

“야! 내 책받침! 국영이 형님 버리고 못 간다!”

 

급한 마음에 광팔이는

책받침을 교복 상의 안에 쑤셔 넣고

담장을 넘으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너무 세게 내리쳐서

탄성이 절정에 달해 있던 책받침이,

담장을 넘는 순간 광팔이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팅—!’ 하고 튕겨 나갔다.


5. 교장 선생님의 대머리를 강타한 책받침

 

하필이면 그 궤적이 예술이었다.

 

날아간 책받침은 담장 너머에서

순찰 중이던 교장 선생님의 대머리 위를

정확히 찰싹! 때리고는 길가 하수구로 수직 낙하했다.

 

“누고! 누대! 내 머리 때린 놈이!”

 

교장 선생님의 고함에

담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광팔이는 얼어붙었다.

 

우리는 담장 밑에서 입을 틀어막고 배를 잡았다.

 

“야, 광팔아...

장국영이 교장 선생님 대머리에

싸이코패스처럼 싸귀(뺨때리기)를 날렸다!”

 

“이건 홍콩 영화가 아이라 <전설의 고향>이다! 책받침의 저주다!”


6. 하수구에 잠든 장국영

 

결국 광팔이는 책받침도 잃고,

교장 선생님께 불려가

‘스승의 머리를 책받침으로 가격한 불효자’가 되어

일주일간 운동장을 돌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수구 근처에서 광팔이를 위로하며 당년정을 불렀다.

 

하수구 속 장국영은

여전히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광팔이는 다시는

책받침으로 판치기를 하지 않겠노라

 

눈물로 맹세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코팅 책받침: 판치기의 필수 아이템. 탄성이 좋을수록 동전이 잘 뒤집히지만, 가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옴.

10원짜리 동전: 당시 고딩들의 전 재산이자, 판치기 판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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