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5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주말 보충 탈출 결사대와 동성로의 주윤발들

멍하게 2026. 5. 27. 09:48
[영웅본색]

영웅본색시리즈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청소년들에게 큰 충격과 열광을 안긴 홍콩 느와르 영화였다.
주윤발과 장국영이 보여준 의리와 비장한 액션, 슬픈 감성은 당시 학생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선글라스와 긴 코트, 성냥개비를 물고 다니는 모습이 유행했고, 친구들끼리 영화 대사를 흉내 내는 문화도 퍼졌다. 홍콩 영화와 OST 열풍을 이끈 대표 작품으로 기억된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후반의 대구 고딩들에게

일요일이란, 달콤한 휴일이 아니라

아침 8시까지 등교해야 하는

잔인한 ‘연장전’에 불과했다.

 

그날도 대구의 대프리카 열기는

아침부터 교실 천장의 똥색 선풍기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있었고,

 

단상 위 수학 선생님의 주사위 확률 설명은

타임머신처럼 우리를 깊은 수면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교실 안은 땀 냄새와 졸음으로 가득 찬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우리 독수리 5형제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바로 전날, 덕구가 입수한 특급 정보 때문이었다.

 

“야, 오늘 오후 2시에 동성로 아카데미 극장에서

<영웅본색 2> 재개봉한다 카대.

게다가 오늘 선착순 100명한테는

주윤발 성님 브로마이드 준단다!”

 

주윤발과 장국영의 피가 흐르는 우리가

교실 구석에서 수학 문제나 풀고 있을 순 없었다.

 

우리는 비장하게 ‘주말 보충 탈출 결사대’를 조직했다.


1. 미친개와 5인의 탈옥수

 

문제는 일요일에도 교문을 지키는

학생부 ‘미친개’ 선생님의 감시망이었다.

 

정문 돌파는 불가능.

남은 건 학교 뒤편,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붉은 벽돌 담장뿐이었다.

 

“내만 믿어라.

내가 먼저 넘어가서 밑에서 받아줄게.”

 

무리 중 유일하게 진퉁 ‘프로스펙스’를 신어

접지력이 좋았던 철수가 날렵하게 담장을 넘었다.

 

그 뒤를 이어 나란히 담장에 매달린 우리들.

하지만 사건은 늘 장비가 부실한 곳에서 터지는 법이었다.


2. 발가락 ‘까발로’의 비명

 

“아이고, 내 발가락이 와 이리 미끄럽노!”

 

늘 앞코가 터져서 발가락이 마중 나와 있던

‘까발로’의 주인 상구가

담장 위에서 중심을 잃고 삐끗했다.

 

“어어? 상구야! 잡으라!”

 

바로 밑에서 상구를 받쳐주려던

광팔이가 소리쳤지만,

중력을 이기지 못한 상구는 그대로 추락했다.

 

하필이면 상구의 터진 운동화 사이로

삐져나와 있던 엄지발가락이

광팔이가 새로 빌려 신은

철수의 운동화 코를 정확히 찍어 내렸다.

 

“악!!! 내 발가락!!!” “아이고!! 내 신발!!!”

 

담장 밑은 순식간에

비명과 진흙 먼지로 가득 찼고,

그 소음은 교무실에 있던

미친개의 촉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문둥이 자슥들이 담을 넘노!!”

 

멀리서 들려오는 사자후에

우리는 앞뒤 볼 것 없이 동성로를 향해 뛰었다.


3. 동성로 한복판의 주윤발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동성로 아카데미 극장 앞.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몰골을 확인했다.

 

상구의 ‘까발로’는

이번 탈출 여파로 엄지발가락을 넘어

검지발가락까지 세상 구경을 하고 있었고,

 

광팔이의 신발엔

상구의 발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멍처럼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극장 포스터 속에서

쌍권총을 들고 있는 윤발이 형님의 간지를 보는 순간,

다리가 부서질 것 같던 고통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야, 우리도 영화 보기 전에

윤발이 형님처럼 가오 좀 잡자.”

 

덕구가 가방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알에 새카맣게 먹칠이 된

500원짜리 플라스틱 보잉 선글라스 5개였다.

 

우리는 그걸 하나씩 나눠 쓰고,

입에는 말랑카우 대신

씹던 껌을 성냥개비처럼 물었다.

 

시장통 ‘나이스’와 터진 ‘까발로’를 신은,

대구 수성구발 짜치지만

뜨거운 주윤발들이 동성로 광장에

우뚝 선 순간이었다.


4. 수성구 장만옥과의 재회, 그리고 몰락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왔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과 시내 구경을 나온

‘수성구 장만옥’ 영자였다.

 

지난번 단팥빵 테러의 기억이 스쳤지만,

선글라스를 낀 덕구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영자 앞을 가로막았다.

 

“헤이, 제인(Jane).

주말에 동성로에서 나를 만나다니,

이건 확률적으로 기적이야.”

 

윤발이 형님 빙의 드립을 치며

멋지게 선글라스를 아래로 스윽 내리던 덕구.

 

하지만 너무 세게 내린 탓에

코 받침이 부러지면서

한쪽 알이 ‘툭’ 떨어져 동성로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덕구의 얼굴은

한쪽 눈은 시커멓고 한쪽 눈은 허연,

흡사 아수라 백작이나 궁예 같은 몰골이 되어버렸다.

 

“푸하하핫! 야, 니 눈탱이가 와 카노!”

 

영자의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웃기기 시작했고,

영자는 측은한 눈빛으로

덕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덕구야... 니 안과 가봐야 대는 거 아이가?

눈이 와 그리 짝짝이고...”

 

영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가던 길을 갔고,

우리 5인방은 동성로 한복판에서

배를 잡고 구르며

덕구의 '궁예 선글라스'를 놀려댔다.


5. 500원짜리 낭만의 극장 안에서

 

비록 영자 앞에서의 가오는

완벽하게 찌그러졌지만,

어둡고 시원한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다시 행복해졌다.

 

스크린 가득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난사하는 윤발이 형님의 모습에,

 

우리 다섯 명은 일제히

입에 물고 있던 껌을 잘게 씹으며 눈을 빛냈다.

 

선글라스 알이 하나 없는 덕구도,

발가락 두 개가 탈옥한 상구도,

그 순간만큼은 홍콩 밤거리를 누비는

세상 가장 멋진 형님들이었다.

 

영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

우리는 선착순으로 받은

윤발이 형님의 브로마이드를

가슴에 꼭 품은 채

 

월요일에 마주할 미친개의 빳따(몽둥이) 걱정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냈다.

 

그 시절 우리에게 낭만이란,

부러진 500원짜리 선글라스 너머로도

세상이 온통 홍콩 느와르처럼 멋지게 보이던 바로 그 마음이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보잉 선글라스 : 문방구에서 팔던 500원짜리 짝퉁. 끼는 순간 동네 골목대장에서 주윤발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으나, 내구성이 약해 자주 궁예로 변신하게 만듦.
  • 아카데미 극장 : 80~90년대 대구 동성로를 주름잡던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청춘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던 해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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