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롤러스케이트장]
대구 국제롤러스케이트장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청소년들의 대표적인 놀이 공간이었다. 형형색색 조명 아래 최신 가요와 디스코 음악이 흐르면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주말이면 교복 차림 학생들로 북적였고, DJ가 음악을 틀어주며 춤을 유도하는 시간도 인기였다. 당시 롤러장은 단순한 운동 공간을 넘어 젊은 문화와 유행의 중심지 같은 곳이었다.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최고의 핫플레이스를 꼽으라면
단연 ‘롤러스케이트장’이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쿵쾅거리는 대형 스피커,
그리고 화려한 조명 속을 질주하는
형, 누나들의 모습은
사춘기 우리들의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건은 화창한 토요일 오후,
덕구가 또다시 우리를 소집하면서 시작됐다.
“야, 오늘 칠성시장 인근 국제롤러스케이트장에
수성구 장만옥, 영자가 친구들하고 온단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은반 위의 지배자…
아니, 롤러장의 지배자가 돼서 영자의 마음을 훔칠 기회다!”
덕구의 말에 우리는 각자 집에 있던
가장 ‘까리한’ 옷들을 꺼내 입었다.
청자켓의 깃을 바짝 세우고,
시장통 ‘나이스’ 운동화 대신
오늘만큼은 롤러장의 대여용 롤러스케이트에
온몸을 맡기기로 했다.
1. 국제롤러스케이트장의 춤추는 무법자들
롤러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런던 보이스(London Boys)의 ‘Harlem Desire’가
귀가 터질 듯 울려 퍼졌다.
화려한 미러볼이 돌아가는 그곳은 흡사 별천지 같았다.
저 멀리서 영자가
하얀 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부드럽게 트랙을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수성구 장만옥’다운 우아한 몸짓이었다.
“야, 기선제압이다. 롤러장은 무조건 ‘뒤로 타기’제!”
무리 중 그나마 운동신경이 좋았던 철수가
진퉁 프로스펙스를 벗어 던지고
롤러스케이트로 갈아 신더니,
멋지게 트랙을 역주행하며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철수에게 쏠렸다.
금수저에 롤러까지 잘 타다니,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2. 광팔이의 ‘유로 댄스’ 브레이크
질투심에 눈이 먼 광팔이가
무리수를 던진 건 그때였다.
당시 롤러장의 고수들은
트랙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는 ‘댄스 타임’을 즐기곤 했다.
“영자야! 내 스텝 좀 봐라!
이게 바로 동성로의 유로 댄스다!”
광팔이는 쿵쾅거리는 비트에 맞춰
골반을 튕기며 현란하게 발을 움직였다.
앞바퀴만 들고 타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광팔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가 빌린 롤러스케이트의 오른쪽 브레이크 고무가
이미 닳아 없어지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어… 어어? 멈추지가 않는다!”
균형을 잃은 광팔이의 다리가
마치 춤추는 낙지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3. 인간 볼링과 상구의 ‘까발로’ 정신
“비켜라! 다 비켜라!!”
광팔이는 통제력을 상실한 채
맹렬한 속도로 트랙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궤적의 끝에는
롤러장 매점 앞 의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려던 상구가 있었다.
상구는 오늘도 발가락이 마중 나와 있는 ‘까발로’를 신은 채
느긋하게 나무젓가락을 쪼개고 있었다.
쾅!!!
광팔이는 정확하게 상구를 받아버렸고,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매점 바닥을 뒹굴었다.
상구가 들고 있던 뜨끈한 컵라면 국물은
공중에서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광팔이의 청자켓 위로 정확히 쏟아졌다.
“악!! 뜨겁다!! 야 이 문둥아,
미팅에 이어 이젠 롤러장에서 단팥빵 대신 라면으로 공격하나!”
“내... 내 라면... 한 입도 못 묵었는데...”
매점 안은 순식간에
라면 스프 냄새와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롤러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4. 장만옥의 손길과 덕구의 폭주
그때, 소란을 보고 영자가
스케이트를 지치며 다가왔다.
진흙탕과 단팥빵에 이어 컵라면 테러까지 목격한 영자는
깊은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광팔이에게 건넸다.
“광팔아... 니 괜찮나?
칠칠치 못하게 와 자꾸 내 앞에서 넘어지고 카노.”
영자의 따뜻한 한마디에
광팔이는 붉어진 얼굴로 감격했고,
이를 지켜보던 덕구의 질투심은 폭발했다.
“비켜라! 진짜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다!”
덕구는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춤을
롤러를 탄 채 재현하겠다며
야심 차게 무대로 뛰어들었다.
텀블링 대신 롤러를 탄 채
공중 제비를 돌겠다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덕구는 벽을 짚고 강하게 탄력을 받아 허공으로 솟구쳤다.
5. 미러볼을 삼킨 소방차
하지만 신은 덕구에게
장국영의 운동신경을 주지 않으셨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덕구는
허우적거리다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거대한 ‘미러볼’을 붙잡고 말았다.
콰직- 보오옹-!
사춘기 남고생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천장 선이 뜯어지며,
덕구는 미러볼을 품에 꼭 안은 채
트랙 한가운데로 추락했다.
순간 롤러장의 모든 조명이 ‘암전’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음악만이 흘러나왔고,
잠시 후 비상등이 켜지자
미러볼을 안고 화성인처럼 누워있는
덕구의 몰골이 드러났다.
“야, 덕구야...
니 이번엔 핑크 꼬리가 아이고 인간 번쩍이(미러볼)가 됐네.”
상구의 무심한 한마디에
영자와 친구들은 배를 잡고 쓰러졌고,
롤러장 DJ 형님은 마이크를 잡고 사자후를 토했다.
“거기 미러볼 안고 있는 문둥이 고딩들!
당장 일로 온나!”
6. 만화방 평상 위에서 부르는 당년정
결국 우리는 롤러장 주인 형님에게 붙잡혀
미러볼 수리비를 물어내겠다는 각서를 쓰고,
땀과 라면 국물, 그리고 먼지로 범벅이 된 채 쫓겨났다.
영자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던
계획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우리는 여느 때처럼 동네 만화방 앞 평상에 모여 앉았다.
100원짜리 짜장라면 한 그릇을
다섯이서 나눠 먹으며,
선글라스 알이 빠진 덕구의 얼굴을 보며
또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월요일 아침,
미친개 선생님의 몽둥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쿵쾅거리던 국제롤러스케이트장의 비트와,
비록 찌그러졌을지언정 친구들과 함께 미러볼을 향해 날아올랐던
그 뜨거운 순간만큼은 우리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였으니까.
[오늘의 추억 아이템]
- 국제롤러스케이트장 : 80년대 대구 청춘들의 해방구이자 사교의 장. 팝송과 유로 댄스가 흐르는 그곳에서 뒤로 타기 한 번이면 동네 최고의 킹카가 될 수 있었다.
- 미러볼(일명 번쩍이) : 롤러장 천장의 상징. 사방으로 오색 빛깔을 뿜어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지만, 가끔 무모한 고딩들의 타겟이 되어 추락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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