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자율학습과 도시락]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대구의 남자고등학생들은 입시 경쟁 속에서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교실에는 형광등 불빛과 문제집 넘기는 소리만 가득했고, 쉬는 저녁시간이 되면 각자 집에서 싸온 양은도시락을 책상 위에 펼쳤다. 김치와 계란프라이 반찬 냄새가 교실에 퍼졌고, 친구들과 반찬을 바꿔 먹거나 난로 위에 도시락을 데워 먹던 풍경은 당시 학창시절의 상징 같은 모습이었다.

1980년대 후반, 대구 남고생들의 저녁 6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시간이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야자)’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우리는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바로 교실 뒷자리 사물함 위에 쌓여 있는
은빛 ‘양은 도시락’이었다.
사건은 유독 바람이 차갑던 어느 화요일 저녁,
교실 천장의 낡은 석면 보드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들 무렵 시작되었다.
“야, 오늘 3교시 체육 시간부터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아이고 천둥이 친다.
종 치자마자 마 바로 뚜껑 여는 끼다!”
광팔이가 침을 삼키며
자신의 도시락통을 만지작거렸고,
우리 독수리 5형제는
교실 뒤편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비장하게 도시락 뚜껑을 열 준비를 마쳤다.
1. 도시락 계급도와 덕구의 홍콩식 반찬
당시 도시락 반찬은
‘신발 계급도’만큼이나 집안의 위세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표였다.
금수저 철수의 도시락에는
노란 계란말이와 분홍 소시지가 예쁘게 깔려 있었고,
평범한 나의 도시락에는
잘 익은 김치볶음과 멸치볶음이 전부였다.
늘 앞코가 터져 있던 상구의 ‘까발로’처럼
그의 도시락 역시 언제나 허연 단무지 몇 조각이 전부였지만,
상구는 개의치 않고 밥을 푹푹 퍼먹곤 했다.
하지만 오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덕구의 도시락이었다.
“야, 이거 봐라.
우리 누나가 이번에 동성로 백화점 지하에서
특별히 구해온 ‘홍콩식 특제 마요네즈’다!
장국영 성님도 촬영장에서
밥 비벼 묵을 때 이거 꼭 뿌려 묵는다 카대!”
덕구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튜브형 마요네즈였다.
덕구는 하얀 쌀밥 위에 마요네즈를
‘Z’ 모양으로 화려하게 그리며 가오를 잡았다.
2. 난로 위의 무법자들과 양은 도시락
“야 이 문둥아,
밥에 와 마요네즈를 뿌리노!
도시락은 무조건 난로 위에 달궈서
흔드는 게 국룰 아이가!”
광팔이가 반박하며
우리 다섯 명의 도시락을
교실 한가운데에 있는 연탄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당시 겨울철 교실의 연탄난로는
거대한 연금술의 장이었다.
맨 밑에 깔린 도시락은
순식간에 밑바닥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구수한 누룽지 냄새를 풍겼고,
맨 위의 도시락은 은은하게 온기를 품었다.
문제는 광팔이가
덕구의 ‘마요네즈 도시락’을 난로 맨 밑바닥,
가장 뜨거운 화력 존에 배치했다는 점이었다.
3. 폭발한 마요네즈와 교실 안의 외계인
“야, 냄새가 좀 이상하다?
홍콩 냄새가 아이고
와 고무 타는 냄새가 나노?”
상구가 무심하게 코를 킁킁거리는 순간,
난로 맨 밑바닥에 있던
덕구의 양은 도시락통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내부 압력으로 인해 ‘콰앙-!’ 소리를 내며
뚜껑이 튀어나갔다.
뜨겁게 달궈진 마요네즈와
김치 국물이 섞인
붉고 하얀 결정체들이
폭죽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하필이면 그 순간 난로 쪽을 바라보며
“내 마요네즈!”를 외치던
덕구의 얼굴에 뜨거운 밥알과 마요네즈 폭탄이 정확하게 명중했다.
덕구의 얼굴은
순식간에 영화 <화성침공>에 나오는 외계인,
혹은 하얀 분장을 한
경극 배우처럼 변해버렸다.
“아이고 내 장국영 핏 짜치네!
덕구야, 니 얼굴이 와 이리 촉촉하노!”
광팔이가 배를 잡고 교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고,
교실 안은 순식간에
고소한 마요네즈 탄내와
웃음소리로 뒤집어졌다.
4. 교문 밖 대구여고의 하굣길, 그리고 목격자
결국 야자 1교시는
감독 선생님께 붙잡혀
교실 바닥에 튄 밥알과 마요네즈를 청소하느라
대걸레를 빨며 보내야 했다.
그리고 밤 10시,
마침내 해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가방을 들고 교문을 나서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당시 우리 학교 근처 버스 정류장은
인근 대구여고의 야자가 끝나는 시간과 맞물려
늘 남고생들과 여고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었다.
“야, 저기 영자 아이가?”
광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있었다.
아직 얼굴에 덜 닦인 하얀 마요네즈 자국과
묘한 김치 탄내를 풍기던 덕구는
영자를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영자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문득 우리 쪽을 바라보았고,
덕구의 해괴한 몰골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침묵.
영자는 커진 눈으로
덕구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가엽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며
친구들의 손을 잡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덕구야... 영자가 니 보고
학교에서 오물통에 빠진 줄 안다...
어이구, 이 불쌍한 자슥아.”
5. 별이 빛나는 밤, 야자실의 낭만
철수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덕구의 얼굴을 마저 닦아주었지만,
이미 덕구의 ‘홍콩 가오’는
대구 앞산 너머로 날아간 뒤였다.
손은 시리고 배는 고팠지만,
우리는 정류장 가로등 밑에서
서로의 몰골을 보며
다시금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상구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낸
삼립호빵 한 개를 다섯이서 조금씩 떼어 나눠 먹으며
우리는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뜨겁고 달콤한 단팥의 맛과,
밤공기 속으로 입을 모아 불어내던 하얀 입김.
그 시절 우리에게
야간자율학습이란 지루한 공부의 시간이 아니라,
껌껌한 밤하늘 아래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촌스러운 낭만을 채워가던
가장 따뜻한 겨울밤의 추억이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양은 도시락 : 80년대 학교 생활의 필수품. 겨울철 교실 연탄난로 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 데워 먹던 그 시절의 감성 자판기. 맨 밑에 깔리면 백프로 바닥이 타서 누룽지가 되곤 했다.
- 연탄난로 : 겨울철 교실 한가운데를 지키던 유일한 난방 기구. 도시락을 데우는 용도 외에도 쥐포를 구워 먹거나 쉬는 시간 고딩들의 주된 수다 광장이 되어주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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