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10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교동시장의 도깨비들과 ‘빽판’의 순정

멍하게 2026. 6. 5. 21:42
[대구 교동시장]

1980년대 후반 대구 교동시장은 의류·잡화·귀금속·전자제품을 함께 취급하던 대구 도심의 대표적인 상권이었다. 특히 전파상과 전자기기 판매점이 밀집해 있어 당시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카세트 플레이어나 오디오 기기를 사기 위해 교동시장을 자주 찾았다. 일본 브랜드인 Sony와 Aiwa 카세트는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새 모델이 나오면 이를 구경하거나 구입하기 위해 교동시장을 찾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여겨졌다. 좁은 골목마다 전파상, 금은방, 의류점, 노점상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동성로 옆 ‘교동시장’은

금단의 열매이자 온갖 진귀한 보물이 가득한 거대한 판타지 세계였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초콜릿부터

정체불명의 수입 구제 옷,

그리고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던 홍콩 영화 비디오와

‘빽판(불법 복제 음반)’이 은밀하게 거래되던 곳.

 

골목마다 풍기는 매콤한 양념오뎅과 납작만두 냄새는

주머니 가벼운 우리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곤 했다.

 

사건은 유독 바람이 차갑던 토요일 오후,

덕구가 얼굴까지 빨개져서 우리를 소집하며 시작되었다.

 

“야, 오늘 교동시장 수입상가 골목에

<영웅본색 2> OST 진짜 오리지널 판이 떴단다!

 

영자가 그 영화 주제곡 ‘당년정’을 그렇게 좋아한다 안카나.

오늘 내 그걸 구해서 영자한테 바칠 끼다!”


1. 양키시장 골목과 독수리 5형제의 잠입

 

우리는 덕구의 장엄한 사랑 서사에 감동하여

교동시장 골목으로 잠입했다.

 

철수는 여전히 진퉁 프로스펙스를 뽐내며 걸었고,

나와 광팔이는 짝퉁 ‘나이스’가 부끄러워 발걸음을 서둘렀다.

 

상구의 ‘까발로’는 오늘도 열일 중이었다.

양말이 또 터졌는지

구제 옷가게 앞에 진열된 화려한 미군 점퍼를 구경할 때마다

상구의 엄지발가락이 자꾸만 마중을 나가 있었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구제 옷 구경 시켜주나? 발 좀 오므려라.”

광팔이가 핀잔을 주었지만

상구는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매콤한 양념오뎅 쪽만 쳐다볼 뿐이었다.


 

2. 수입 레코드숍과 단속반의 습격

우리는 교동시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는 사람만 간다는 비밀 레코드숍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장국영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레코드판 특유의 알싸한 냄새로 가득했다.

 

덕구는 눈을 빛내며 사장 형님에게 다가가

마침내 호주머니 속 전 재산을 털어

장국영 얼굴이 크게 박힌 <영웅본색 2> 빽판을 손에 넣었다.

 

“야, 드디어 구했다! 영자야, 기다려라!”

 

덕구가 감격에 겨워 레코드판을 가슴에 꼭 품은 그 순간,

가게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험악한 덩치들이 들이닥쳤다.

 

불법 복제 음반을 단속하는 단속반과 경찰들이었다.

 

“거기 빽판 파는 사장! 그리고 교복 입은 문둥이 자슥들 다 가만히 있어!”


 

3. 까발로가 날린 레코드판 비행기

 

“도망쳐라!”

 

사장 형님의 외침과 동시에

레코드숍 안은 혼비백산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5인방은 단속반의 팔뚝 사이를 절묘하게 빠져나와

좁은 교동시장 골목길로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수입 과자 상자가 겹겹이 쌓인 골목 모퉁이를 돌 때,

늘 앞코가 터져 접지력이 부실했던

상구의 ‘까발로’가 미끄러지면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상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다가

그만 앞서 달리던 덕구의 가방을 덥석 붙잡았다.

 

“으악! 상구야, 이거 놓으라!”

 

덕구의 가방 지퍼가 부서지며

가슴에 품고 있던 장국영 빽판이

공중으로 백회전 고속 비행을 하며 날아갔다.

 

하필이면 그 궤적 끝에는

골목 평상에 앉아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친구들과 매운 양념오뎅을 먹던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있었다.


 

4. 납작만두 양념장과 장국영의 눈물

 

공중을 가르던 빽판은 정확하게 영자 앞 테이블에 놓여 있던

거대한 납작만두 양념장 대접에 ‘풍덩-!’ 하고 다이빙을 했다.

 

쫘악-!

 

걸쭉하고 새빨간 고춧가루 양념장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중 가장 큰 덩어리가 영자의 새하얀 패딩 점퍼 가슴팍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꺄아악! 이게 뭐야!”

 

영자의 비명과 함께,

양념장 대접에서 건져 올려진 레코드판 속 장국영 성님의 얼굴은

마치 빨간 피눈물을 흘리는 아수라 백작처럼 변해 있었다.

 

덕구는 단속반이 쫓아오는 것도 잊은 채 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 영자야! 네 주려던 장국영인데... 오해가 있다!”


 

5. 빽판은 튀김 냄새를 남기고

 

영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니들은 진짜 마귀다, 마귀!”라며

친구들과 함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우리 역시 뒤쫓아온 단속반을 피해

교동시장 먹자골목 으슥한 천막 뒤로 숨어들어야 했다.

 

결국 단속반은 따돌렸지만,

덕구의 빽판은 빨간 양념장으로 가득 절여져

다시는 턴테이블 위에 올릴 수 없는

음악 없는 플라스틱 판때기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돈을 모아 영자의 세탁비를

영자 친구 편으로 눈물겹게 전달하고는,

 

남은 돈 몇 백 원으로 교동시장 골목 구석에서

식어버린 납작만두를 오뎅 국물에 찍어 먹었다.

 

“야, 덕구야. 그래도 장국영 얼굴에 고춧가루 묻으니까

꼭 영웅본색 총 맞은 장면 같고 가오 사네.”

 

광팔이의 짓궂은 농담에 덕구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니들이 당년정의 그 뜨거운 마음을 아나... 문둥이 자슥들...”

 

비록 영자에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려던 서툰 순정은

매콤한 만두 양념장 범벅이 되어 찌그러졌지만,

 

고소한 기름 냄새와 노을빛이 가득했던 그 시절

교동시장의 골목길은 우리들의 철없고 눈부셨던

청춘의 한 페이지로 서글프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빽판 : 80년대 정식 수입되지 못한 팝송이나 홍콩 영화 음반을 조잡하게 복제해 팔던 검은색 레코드판. 음질은 지직거렸지만 그 시절 청춘들의 귀를 넓혀주던 비밀 통로였다.
  • 납작만두 : 얇은 만두피에 당면만 살짝 넣어 구워낸 대구의 명물. 돈 없던 고딩들이 교동시장 골목에 모여 양념장을 듬뿍 뿌려 먹던 최고의 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