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11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서문시장 미로 속의 '청청 패션'과 칼국수 대첩

멍하게 2026. 6. 5. 23:01

[대구 서문시장]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패션의 완성’은 동성로가 아니라, 뜻밖에도 서문시장 2지구 의류 상가 골목에서 완성되곤 했다.
동성로 브랜드 옷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서문시장 옷골목은 최신 유행하는 청바지와 청자켓을 가장 저렴하게 ‘득템’할 수 있는 패션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장 골목 구석구석에서 풍기는 진한 멸치 육수 냄새와 칼국수 썰는 소리는 언제나 배고픈 고딩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최고의 유혹이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사건은 이른 봄바람이 불던 토요일 오후,
덕구가 또다시 우리 5인방의 만화방 아지트 문을 거차게 열어젖히며 시작되었다.
 
“야! 대구여고 영자가 다음 주에 친구들하고
수성못으로 봄소풍 간다 카대!
 
오늘 서문시장 가서 요즘 제일 잘나가는 청청 패션으로 쫙 빼입고,
소풍날 영자 앞에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는 끼다!”


1. 2지구 옷골목과 독수리 5형제의 ‘가오’

우리는 덕구의 원대한 패션 혁명에 동참하기 위해
서문시장으로 향했다.
 
철수는 아버지가 사준 진퉁 프로스펙스를 신은 채 거드름을 피웠고,
나와 광팔이는 짝퉁 ‘나이스’가
시장 바닥의 수많은 인파에 밟힐까 봐 발을 조심조심 디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상구의 ‘까발로’였다.
 
천을 덧대 꿰매 입은 상구의 청자켓은
이미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꼬라지였고,
 
운동화 코 앞바퀴 쪽은 여전히 구멍이 나 있어
걷기만 해도 발가락이 시장 바닥을 구경하고 있었다.
 
“야, 상구야. 오늘 덕구 옷 사러 왔는데
니 발가락이 와 자꾸 청바지 원단 매대 쪽을 찌르고 카노.
발 좀 치우라!”
 
광팔이가 호통을 쳤지만
상구는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배고프다, 칼국수 냄새 나네”라며 코만 킁킁거렸다.


2. '돌청 청바지'와 덕구의 무리수

서문시장 2지구의 좁디좁은 옷골목은
상인들의 외침과 교복을 벗어던진 고딩들로 인산인해였다.
 
덕구는 눈을 홉뜨고 골목을 뒤지다가,
당시 최고 유행이던 하얗게 물을 뺀
‘돌청(스톤워시드) 청바지’와 청자켓 세트를 발견했다.
 
덕구는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옷을 구매하더니,
가게 구석 천막 안에서 당장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주윤발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노? 내 좀 장국영 같나? 바지 핏이 예술 아이가!”
 
문제는 덕구가 가오를 살리겠다고
자기 사이즈보다 무려 두 치수나 작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꽉 끼는
일명 ‘독종 스키니 핏’ 청바지를 억지로 껴입었다는 점이었다.
 
걸을 때마다 덕구의 다리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움직였다.


3.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의 조우

“야, 옷도 샀으니 상구 소원대로
칼국수나 한 그릇씩 묵고 가자.”
 
우리는 대형 천막 아래 수십 개의 노점이 모여 장관을 이루는
서문시장 국수 골목으로 향했다.
 
나무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매콤한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던 그 순간,
철수가 다급하게 내 옆구리를 찔렀다.
 
“야, 저... 저기 보이나? 대구여고 빨간 목도리!”
 
저 멀리 좁은 국수 골목 사이로
친구들과 함께 잔치국수를 먹으러 온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영자는 오늘도 단정한 단발머리에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덕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새로 산 돌청 자켓의 깃을 바짝 세우며
평상에서 멋지게 일어나
영자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헤이, 영자... 주말에 서문시장의 맛을 즐기러 온 기가?”


4. 터져버린 지퍼와 양념장 샤워

사건은 덕구가 영자에게 주윤발식 윙크를 날리며
평상에서 무리하게 다리를 뻗어 내려오던 순간 터졌다.
 
사이즈가 너무 작아 터질 듯 팽팽했던
덕구의 청바지 지퍼와 앞 단추가,
가해지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팅—! 팍—!’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어... 어어??”
 
중심을 잃은 덕구는
하필이면 바로 옆 평상에서 아주머니가 갓 썰어내어
육수를 부으려던 거대한 ‘얼큰이 칼국수 대접’ 위로 고꾸라졌다.
 
콰당탕-! 철퍼덕!
 
진한 멸치 육수와 고춧가루 양념장,
그리고 갓 삶은 밀가루 면발들이
폭죽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 뜨끈하고 걸쭉한 칼국수 면발더미가
덕구의 얼굴과 온몸에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정확하게 내려앉았다.
 
덕구의 얼굴은 순식간에 칼국수 가닥으로 뒤덮여
흡사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에 나오는 문어 괴물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5. 국수 면발을 뒤집어쓴 장국영

“꺄아악! 이게 뭐야!
덕구 니 얼굴에 국수가 와 있노!”
 
영자와 친구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국수 노점 아주머니는 굵은 대구 사투리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 문둥이 고딩 자슥들이 남의 장사 밑천을 다 엎어뿌네!
당장 안 일어서나!”
 
덕구는 얼굴에서 밀가루 면발을 걷어내며
“영... 영자야! 네 주려던 멋진 청청 패션인데...”라며
울상을 지었지만,
 
지퍼가 터져 속옷이 훤히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국수 가닥을 휘감은 덕구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영자는 기가 찬다는 듯이 이마를 짚더니
“덕구 니는 진짜 대구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다...”라며
친구들의 손을 잡고 서둘러 시장통 미로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6. 100원짜리 멸치 육수의 위로

결국 우리는 노점 아주머니에게
국수 값과 양념장 값을 눈물겹게 변상한 뒤,
 
지퍼가 터진 덕구의 허리춤을
상구의 구멍 난 청자켓으로 대충 가려준 채
서문시장 샛골목 평상에 걸터앉았다.
 
새로 산 덕구의 돌청 청바지는
이미 멸치 육수와 고춧가루 얼룩으로 붉고 누렇게 절여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돈을 모아 겨우 주문한
식어버린 삼각만두 한 접시를 다섯이서 소중하게 나눠 먹었다.
 
“야, 덕구야.
그래도 청바지에 김치 국물 아이고
멸치 육수 배어서 하루 종일 구수한 냄새 나고 좋네.
시장 경제의 냄새다.”
광팔이의 얄미운 농담에
 
덕구는 터진 청바지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시장 바람을 맞으며 웅얼거렸다.
 
“내 소풍날 우째 가노... 이 문둥이 자슥들아...”
 
 
 
비록 영자 앞에서 홍콩 느와르급 패션을 자랑하려던 서툰 순정은 매콤한 칼국수 범벅이 되어 가차 없이 찌그러졌지만, 사람 냄새와 활기찬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그 시절 겨울 끝자락의 서문시장 골목길은 우리들의 서투르고 눈부셨던 청춘의 한 페이지로 구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돌청 청바지(스톤워시드 데님) : 1980년대 후반 청춘들을 지배했던 최고의 패션 아이템. 돌과 함께 원단을 비벼 빨아 하얗게 얼룩을 만든 청바지로, 당시 청자켓과 세트로 입는 ‘청청 패션’은 고딩들의 로망이었다.
  • 서문시장 칼국수 : 양이 푸짐하고 멸치 육수 맛이 진해 대구 시민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명물. 돈 없던 시절 고딩들이 단돈 몇 백 원으로 배를 채울 수 있던 최고의 시장 힐링 푸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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