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13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두류공원 돗자리와 전설의 ‘오리배 표류기’

멍하게 2026. 6. 9. 08:11
[대구 두류공원(우방타워랜드)]

대구 두류공원(우방타워랜드)은 1980년대 후반 대구 청춘들에게 일탈과 설렘이 공존하던 최고의 종합 놀이공원이자 휴식처였습니다. 특히 80년대 말은 현재의 이월드 자리에 대구 최초의 대형 테마파크인 ‘우방타워랜드’가 한창 건설 중이던 시기였기에, 고딩들은 두류공원 야외음악당 잔디밭이나 야외 롤러스케이트장, 그리고 두류수영장 뒤편 숲길을 걸으며 주말의 자유를 만끽하곤 했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고딩들이 커다란 돗자리와 뻐꾸기 도시락을 들고 모여들어 대구여고 여학생들과의 ‘우연한 로맨스’를 가장 많이 기획하던, 그 시절 대구 청춘들의 거대한 푸른 아지트였습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말, 대구 고딩들에게

주말의 ‘두류공원’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을 탈출한

청춘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해방구였다.

 

푸르게 펼쳐진 잔디밭과 야외 음악당,

그리고 저 멀리 두류산 자락을 배경으로

대구 전역의 고딩들이 저마다 가장 까리한 사복을 입고 가오를 잡던 곳.

 

특히 두류공원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성당못’은

주말이면 데이트를 즐기려는 청춘들의 오리배로 가득 차 장관을 이루곤 했다.

 

사건은 벚꽃 잎이 눈처럼 날리던 어느 일요일 오후,

덕구가 만화방 평상 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야! 대구여고 영자가 오늘 친구들하고

두류공원 성당못으로 오리배 타러 온단다!

 

오늘이야말로 내 강력한 허벅지 엔진으로

오리배를 몰아서 영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끼다!”


1. 두류공원 잔디밭의 사복 패션 대결

우리는 덕구의 원대한 수상 가오에 동참하기 위해

두류공원으로 향했다.

 

철수는 오늘도 아버지가 서울 출장길에 사다 주신

백색 ‘프로스펙스’ 단화를 신고

대학생 같은 자태를 뽐냈고,

 

나와 광팔이는 짝퉁 ‘나이스’ 체크 마크가 유독 도드라져 보일까 봐

잔디를 밟을 때마다 발을 슬쩍슬쩍 숨겼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의 가장 큰 시한폭탄은 상구의 ‘까발로’였다.

 

나름 봄바람을 맞이하겠다고 상구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 오신 화려한 꽃무늬 남방을 입고 왔는데,

 

그 아래로 여전히 앞코가 뻥 뚫려

엄지발가락이 마중 나와 있는 까발로 운동화의 조합은

그야말로 두류공원 전체를 통틀어 독보적인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두류공원 바람 쐬어주려고

와 자꾸 신발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카노. 발 좀 오므려라!”

 

광팔이가 호통을 쳤지만,

상구는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공원 앞 번데기 냄새 좋네”라며 코만 킁킁거렸다.


2. 성당못의 장만옥과 오리배 레이스

우리는 마침내 버드나무 가지가

흐드러지게 늘어진 성당못 가에 도착했다.

 

과연 덕구의 첩보대로,

저 멀리 성당못 선착장에서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친구와 함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분홍색 오리배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 위로

영자의 미소가 번지는 모습은 흡사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철수야! 당장 저 옆에 있는 파란색 오리배 빌려라! 추격 개시다!”

 

덕구는 전 재산을 털어 오리배 승선권을 끊더니,

나와 철수를 양쪽 페달 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줄이 끊어진 통기타 소동의 패배를 만회하겠다는 듯,

덕구는 오리배 조타 핸들을 꽉 붙잡고 선장처럼 소리쳤다.

 

“영자야! 주말에 성당못 위에서 조우하다니,

이건 확률적으로 운명이다!”


3. 강력한 허벅지 엔진과 조타 핸들의 배신

“철수야, 밟아라!

쇠질하는 맨치로 미친 듯이 밟아라!”

 

덕구의 지휘 아래,

나와 철수는 시장통 나이스와 진퉁 프로스펙스를 신은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고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파란 오리배는 엄청난 속도로

영자의 분홍 오리배를 향해 성당못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영자와 친구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기선제압은 성공적이었다.

 

사건은 덕구가 영자의 오리배 옆에 바짝 붙여

멋지게 급회전을 시도하려는 순간 터졌다.

 

뒤에서 상구가 “야, 저기 연못 가운데 돌멩이 있다”라며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그만 터진 ‘까발로’ 앞코 구멍 사이로 비져나와 있던 엄지발가락이

오리배 밑바닥의 방향 전환 케이블 선에 걸려 툭 뜯어 버린 것이다.

 

뚝- 보오옹-!

 

“어… 어어? 핸들이 와 이리 헛돌지?”

조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우리 오리배는

회전을 멈추지 못하고 성당못 한가운데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4. 성당못 대폭발과 인공폭포의 저주

“비켜라! 다 비켜라!!”

 

방향 감각을 잃고 폭주하는 우리 파란 오리배는

분홍 오리배를 스치듯 지나쳐,

하필이면 그 시절 성당못 한구석에서 거세게 물줄기를 뿜어내던

‘인공폭포’ 안쪽 진입 금지 구역으로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아아아아-! 쾅!

 

폭포 아래 바위에 들이받음과 동시에

거대한 물벼락이 오리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필이면 맨 앞에 서서 “영자야!”를 외치던 덕구의 얼굴에

인공폭포의 거센 물줄기가 정면으로 들이쳤다.

 

덕구의 머리는 순식간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고,

남방 안에 넣어두었던 영자에게 줄 편지 봉투는

물에 젖어 흐물흐물한 죽처럼 변해버렸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건,

충격으로 인해 오리배 앞코에 붙어 있던 플라스틱 오리 대가리가

‘뚝-!’ 부러지며 성당못 바닥으로 수직 낙하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5. 목이 부러진 오리와 장만옥의 실종

“으악! 대가리 없는 오리가 나타났다!”

 

주변에서 오리배 데이트를 즐기던

대구 청춘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선착장에 있던 관리실 아저씨는

메가폰을 잡고 대구 사투리로 사자후를 토해냈다.

 

“거기 목 부러진 파란 오리배 탄 문둥이 고딩 자슥들!

당장 배 대라! 너희 오늘 다 죽었다!”

 

덕구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

부러진 오리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영... 영자야! 내 마음은 진심이다!”라고 외쳤지만,

 

영자는 이미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친구와 함께 페달을 미친 듯이 밟아 선착장 너머 정문 쪽으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6. 두류공원 매점 앞과 우리들의 푸른 봄

결국 우리는 관리실 아저씨에게 붙잡혀

오리배 수리비를 물어내겠다는 각서를 쓰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덕구를 끌고

두류공원 매점 앞 허름한 천막 아래로 피신해야 했다.

 

덕구의 꽃남방은 성당못 물이 들어 얼룩덜룩해졌고,

부러진 오리 대가리는 매점 평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리는 주머니 속 10원짜리 동전까지 탈탈 털어

주문한 200원짜리 컵 번데기 한 통을

다섯이서 이쑤시개로 콕콕 찔러 나눠 먹으며 덜덜 떠는 덕구를 위로했다.

 

“야, 덕구야. 그래도 오리 대가리가 날아가니까

꼭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폭탄 맞고 부서진 헬기 같고 가오는 사네.”

 

광팔이의 짓궂은 농담에 철수가 번데기를 입에 넣어주며 덧붙였다.

“다음 주엔 진짜 얌전하게 잔디밭에서 돗자리나 깔고 빵이나 묵자, 이 문둥이 자슥아.”

 

비록 영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남고생의 호기기 가득한 오리배 레이스는

성당못 대참사로 처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봄바람에 실려 오던 풋풋한 풀냄새와 짭조름했던 번데기의 맛은

우리들의 서투르고 찬란했던 고교 시절의 한 페이지로 푸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성당못 오리배 : 80~90년대 대구 두류공원의 명물이자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 발 페달을 열심히 굴러야 앞으로 가는 아날로그식 놀이기구로, 가끔 과도한 가오를 잡던 고딩들의 체력 측정기가 되기도 했다.
  • 컵 번데기 : 그 시절 유원지나 공원 앞에서 파던 대표적인 길거리 간식.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으로 돈 없던 고딩들이 이쑤시개 하나로 우정을 나누던 최고의 가성비 영양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