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16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남문시장 누런 종이 향기와 뜻밖의 페이지

멍하게 2026. 6. 17. 18:21

[대구 남문시장 헌책방 골목]

대구 남문시장 헌책방 골목은 1950년대 피란민들이 명덕네거리와 남문시장 주변에 노점을 차려 책을 팔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대구의 대표적인 아날로그 문화 거리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참고서나 전과를 싸게 사려는 고딩들뿐만 아니라,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해외 수입 잡지나 소설책을 찾으려는 청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좁은 매대 가득 쌓인 누런 종이 냄새와 오래된 책들이 주는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공간으로, 늘 시끄럽던 고딩들도 이곳의 낡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만큼은 묘한 설렘과 경건함을 느끼곤 했던 추억의 골목입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말 대구 고딩들에게
학기 초나 시험 기간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찾아가는 코스가 있었으니,
바로 남문시장 안쪽에 길게 늘어선 ‘헌책방 골목’이었다.

천장까지 탑처럼 쌓인 빛바랜 책들 사이를 헤집다 보면,
선배들이 쓰던 수학 정석을 반값에 득템하거나
운이 좋으면 표지가 뜯어진 홍콩 수입 하이틴 잡지를 건질 수도 있는  묘한 보물섬 같은 곳.
 
누렇게 바랜 종이 냄새가 아스라이 풍기는 그 골목은,
늘 동성로에서 소리를 지르며 가오를 잡던
우리 독수리 5형제의 발걸음조차 자연스레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날은 유독 초여름을 재촉하는 잔잔한 비가 대구 시내를 촉촉이 적시던 토요일 오후였다.


 

1. 빗소리 가득한 헌책방 골목의 다섯 소년

 
우리는 비를 피해 남문시장 서점가의 처마 밑을 나란히 걸었다.
 
철수는 아버지가 새로 사주신 검은색 프로스펙스 가죽 단화를
조심조심 디디며 빗물이 튀지 않게 걸었고,
 
나와 광팔이는 비에 젖어
로고가 살짝 들뜨기 시작한 짝퉁 ‘나이스’ 운동화가 신경 쓰여 연신 발을 굴렀다.
 
하지만 오늘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상구의 ‘까발로’였다.
 
비가 오자 상구는 나름의 방수 대책이랍시고
노란색 고무줄로 운동화 앞코의 구멍을 꽁꽁 묶고 나타났는데,
걸을 때마다 찔끔찔끔 고개를 내미는 엄지발가락의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했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오늘 남문시장 투어 하느라 고생이 많다. 비 다 맞네.”
광팔이가 픽 웃으며 우산을 털자,
 
상구는 서점 매대에 꽂힌 오래된 소설책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답했다.
“종이 냄새 좋다. 비 오니까 더 진하네.”


 

2. 헌책 속에 숨겨진 대구여고의 흔적

 
우리는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지나 참고서
코너를 뒤지던 덕구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그가 집어 든 것은 연두색 표지의 낡은 <성문 종합영어> 책이었다.
덕구가 숨을 죽인 채 책장 첫 페이지를 펼치자, 
 
거기에는 단정한 손글씨로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구여고 2학년 김영자"
 
“야! 이거 영자가 보던 책이다!
대구여고 장만옥의 숨결이 여기 그대로 살아있다 카이!”
 
덕구는 세상을 다 가진 고고학자처럼 흥분하며
당장 주머니 속 동전을 탈탈 털어 그 책을 구매했다.
 
늘 영자 앞에서 사고만 치던 덕구였기에,
영자가 보며 밑줄을 긋고 고민했을 참고서를 손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설레는 모양이었다.


 

3. 페이지 사이에 끼워진 낡은 편지

 
헌책방 모퉁이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덕구가 소중하게 영자의 영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단어마다 꼼꼼하게 적힌 한글 뜻과,
여고생 특유의 아기자기한 별 모양 낙서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영자의 흔적을 공유했다.
 
그러다 책의 정중앙, 관계대명사 파트가 적힌 두꺼운 페이지 사이에서
빳빳하게 접힌 하얀 종이 한 장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이게 뭐고? 편지지가?”
광팔이가 얼른 주워 펼치려 하자,
덕구가 정색을 하며 빼앗아 들었다.
 
그것은 영자가 누군가에게 보내려다
차마 보내지 못하고 책 속에 끼워둔 비운의 편지였다.
 
덕구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헌책방의 어두운 알전구 조명 아래서 영자의 글씨를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4. 소년, 장국영의 가오를 내려놓다

[... 매일 반복되는 단어 시험과 자율학습이 너무 답답해. 가끔은 내가 진짜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며칠 전에는 동성로 빵집에서, 또 롤러장에서 어떤 남고생 애들이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다가 크게 넘어지는 걸 봤어. 온통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미러볼을 삼키면서까지 바보처럼 굴던 그 애들 말이야. 처음엔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부러워지더라. 저 애들은 저렇게 온몸이 망가지면서도 뭐가 저리 즐거울까. 나도 저 애들처럼 한 번쯤은 남의 시선 상관없이 펑펑 웃고, 터진 바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어...]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덕구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 수록 조금씩 가늘게 떨렸다.
 
언제나 장국영처럼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500원짜리 색안경을 끼고 윙크를 날리며 무리수를 던졌던 우리들이었다.
 
영자가 우리를 ‘대구 최고의 트러블 메이커’라고 부르며 도망칠 때마다
우리는 가오가 구겨졌다며 자책하곤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그 철없고 촌스러운 소동들이
정작 숨 막히는 입시 현실에 갇혀 있던 여고생 영자에게는
부러운 자유이자 작은 위로였던 셈이다.
 
덕구는 한참 동안 멍하니 편지지를 바라보더니,
언제나 부리던 극성맞은 호기를 부리지 않고
조심조심 편지를 다시 접어 영어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5. 비 개인 남문시장, 홀로 남은 문장

 
“야, 덕구야. 이거 영자 갖다 줘야 대는 거 아이가?”
 
철수의 물음에 덕구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이다. 이건 영자의 비밀 기라. 내 손에 들어온 것도 비밀이고.”
 
늘 영자만 보면 “헤이 제인!”을 외치며 주윤발 흉내를 내던 덕구였지만,
오늘만큼은 진짜 영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주 조금 더 깊고 성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헌책방을 나서는 길,
어느새 대구의 하늘을 뿌옇게 가리던 봄비가 잦아들고
서점가 지붕 사이로 부드러운 해 질 녘의 노을빛이 길게 비쳐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배를 잡고 구르거나
“문둥이 자슥”이라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상구는 고무줄이 툭 끊어진 ‘까발로’ 운동화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묵묵히 느꼈고,
우리는 그저 서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남문시장 골목길을 조용히 걸어 나왔다.
 
비에 촉촉이 젖은 헌책들의 누런 종이 냄새가
우리들의 교복 깃 사이로 은은하게 스며들던 토요일 저녁.
 
비록 영자에게 멋진 가오를 자랑하진 못했지만,
누군가의 닫힌 마음속 일기장을 가만히 안아줄 수 있게 된
우리들의 철없던 1988년의 봄날은
 
남문시장 헌책방의 낡은 페이지처럼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깊은 문장으로 남아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성문 종합영어 : 80~90년대 고등학생들의 필수이자 통곡의 영어 참고서. 빽빽한 영문법과 단어들로 가득해 사춘기 청춘들을 괴롭혔지만, 가끔은 남모르는 낙서나 편지를 숨겨두는 가장 안전한 비밀 보관소가 되기도 했다.
  • 남문시장 헌책방 골목 : 대구 청춘들의 손때 묻은 지식과 추억이 거래되던 아날로그 공간. 새 책의 빳빳함은 없지만, 앞서간 이들의 흔적과 세월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묘한 위로를 주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