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경대)는 1980년대 대구 수성구와 북구 일대 고딩들에게 단순한 대학 교정을 넘어, 지독한 입시 스트레스를 잠시 피할 수 있었던 최고의 '문화 해방구'이자 데이트 코스였습니다. 탁 트인 대운동장과 낭만적인 백양로, 그리고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러브로드'는 대구여고 여학생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꿈꾸는 남고생들의 단골 아지트였습니다. 주머니 가벼운 고딩들은 경대 정문 앞 분식집에서 저렴한 떡볶이로 배를 채우고, 대학교 형들이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찬란한 대학 생활의 로망을 키워가곤 했습니다.

1980년대 말, 야간자율학습과
빳따(몽둥이)에 찌들어 살던 대구 남고생들에게
북구 산격동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교정은
그야말로 자유와 낭만이 가득한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 형, 누나들의 모습은
고3을 앞둔 우리들에게 거대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주말이면 우리 독수리 5형제는 마치 미래의 경북대생이라도 된 양
교복을 벗어던지고 경대 교정을 제집 안마당처럼 활보하곤 했다.
사건은 완연한 봄기운이 만연하던 어느 일요일 오후,
덕구가 어디서 구했는지
줄이 두 개나 끊어진 낡은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면서 시작되었다.
“야! 오늘 대구여고 영자가 친구들하고
경북대 일청담(본관 앞 못)으로 바람 쐬러 온단다!
오늘이야말로 내 이 통기타로 감미로운 세레나데를 불러서
영자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릴 끼다!”
1. 백양로를 걷는 독수리들의 ‘위장 전술’
우리는 덕구의 원대한 음악적 가오에 동참하기 위해
경북대 정문을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철수는 아버지가 새로 사주신
백색 ‘프로스펙스’ 단화를 신고 대학생 같은 여유를 부렸고,
나와 광팔이는 짝퉁 ‘나이스’의 로고가
혹시라도 진짜 대학생 형들에게 들킬까 봐 발걸음을 조심히 디뎠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의 가장 큰 시한폭탄은 상구의 ‘까발로’였다.
대학생 형들의 세련된 청바지 핏을 흉내 내겠다며
상구는 통이 넓은 디스코 바지를 입고 왔는데,
그 아래로 여전히 구멍이 뻥 뚫려 엄지발가락이 마중 나와 있는
까발로 운동화의 조합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촌스러움의 극치였다.
“야, 상구야. 니 발가락 경북대 캠퍼스 구경하라고
와 자꾸 밖으로 탈옥을 하고 카노. 발 좀 집어넣으라!”
광팔이가 면박을 주었지만,
상구는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경대 정문 앞 떡볶이 냄새 좋네”라며 코만 킁킁거릴 뿐이었다.
2. 일청담의 장만옥과 덕구의 장국영 빙의
우리는 마침내 경북대의 명물인 본관 앞 분수대,
‘일청담’ 잔디밭에 도착했다.
과연 덕구의 첩보대로,
저 멀리 잔디밭 벤치에
대구여고 퀸카 영자가 친구들과 앉아
칠성사이다를 마시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단발머리는 흡사 홍콩 영화 속 장만옥 그 자체였다.
덕구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더니,
줄이 네 개밖에 남지 않은 낡은 통기타를 고쳐 잡고
잔디밭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장국영이 영화 <천장지구>에서 오토바이를 탈 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자야... 봄바람이 부는 경대 교정에서 너를 만나니,
내 가슴속에서 음악이 멈추질 않네.
내 노래 한번 들어볼래?”
덕구는 가방에서 피크 대신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들고,
연습도 안 한 이문세의 ‘소녀’ 코드를 짚으며
거칠게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징— 지이잉— 딩—
줄이 두 개나 없어서 불협화음이 공터에 울려 퍼졌지만,
덕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영자와 친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었다.
3. 까발로의 대형 스크래치와 도미노 추락
사건은 덕구가 하이라이트 고음 부분에서
감정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기타를 하늘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를 시도하려는 순간 터졌다.
바로 뒤에서 대학생 형들의 가방을 구경하며
발을 꼼지락거리던 상구의 터진 ‘까발로’ 앞코가,
하필이면 덕구가 깔고 앉아 있던 돗자리 모퉁이에 걸려버린 것이다.
중심을 잃은 상구의 거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어? 상구야 잡으라!”
뒤에서 지켜보던 광팔이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상구는 그대로 덕구의 등짝을 덮쳤고,
덕구는 그 반동으로 기타를 든 채
일청담 분수대 못 안으로 정확하게 수직 낙하했다.
콰당탕-! 풍덩-!
차가운 못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물속에서 건져 올려진 덕구의 머리 위에는
일청담의 푸른 이끼와 낙엽들이 미역처럼 잔뜩 얹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건,
덕구가 그토록 아끼던 통기타의 몸통이
일청담 바닥의 돌에 부딪혀 ‘콰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정확하게 쪼개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4. 일청담의 괴물과 장만옥의 실종
“으악! 괴물이다! 일청담에 괴물이 나타났다!”
주변에서 잔디밭 데이트를 즐기던 대학생 커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본관을 순찰하던 학교 경비 아저씨는
굵은 사투리로 호통을 치며 달려왔다.
“이 문둥이 고딩 자슥들이
신성한 대학교 교정에서 와 물놀이를 하고 카노!
당장 안 나오나!”
덕구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
반파된 기타 넥을 손에 든 채 “영... 영자야! 내 노래 아직 2절 남았다!”라고 외쳤지만,
영자는 이미 부끄러움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친구들의 손을 잡고 백양로 너머 정문 쪽으로
전력 질주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5. 경대 정문 앞 떡볶이와 우리들의 푸른 봄
결국 우리는 경비 아저씨에게 붙잡혀
깜지(반성문) 수준의 인적 사항을 적어내고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덕구를 끌고
경북대 정문 앞 허름한 분식집 천막 안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덕구의 새로 산 남방은 일청담 이끼 물이 들어 초록색으로 변해 있었고,
반으로 쪼개진 기타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우리는 주머니의 10원짜리까지 탈탈 털어
주문한 300원짜리 떡볶이 한 접시에
오뎅 국물을 마시며 덜덜 떠는 덕구를 위로했다.
“야, 덕구야. 그래도 기타가 반으로 쪼개지니까
꼭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쌍권총 맞고 부서진 무기 같고 간지는 작살나네.”
광팔이의 짓궂은 농담에
철수가 떡볶이 떡을 입에 넣어주며 덧붙였다.
“내년엔 꼭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이 경대 잔디밭에서 진짜 진퉁 기타 치자, 이 문둥이 자슥아.”
비록 영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남고생의 감성 세레나데는
일청담 분수대 입수 쇼로 처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푸르른 대학 교정의 잔디 냄새와 매콤달콤했던 떡볶이의 맛은
우리들의 서투르고 찬란했던 고교 시절의 한 페이지로
싱그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일청담 : 경북대학교 본관 앞에 위치한 대형 분수대 못. 그 시절 대구 청춘들의 만남의 광장이자 데이트 명소였지만, 과도한 가오를 잡던 고딩들이 가끔 물에 빠지는 흑역사의 성지이기도 했다.
- 통기타 : 80년대 대학 문화와 낭만의 상징. 코드 몇 개만 짚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가오를 잡을 수 있었던, 그 시절 청춘들의 필수 순정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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