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제7화 대백시계탑, 멈춰진 우리들의 시간] 삐삐와 공중전화, 그리고 밤새도록 흐르던 당년정

멍하게 2026. 5. 31. 09:57

[삐삐와 공중전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고등학생들에게 삐삐(무선호출기)는 선망의 물건이었다. 숫자 암호로 마음을 전하거나 친구 약속 시간을 맞추곤 했지만, 삐삐를 받으면 결국 공중전화로 달려가야 했다. 학교 앞과 버스정류장 공중전화에는 긴 줄이 생겼고, 주머니 속 동전과 전화카드는 필수품이었다. 밤늦게 학원이나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뒤 부모에게 “끝났어요”라고 짧게 연락하던 풍경도 흔했다.

 

AI로 생성된 이미지 입니다.

 

1980년대 말이 저물어가던 그 시절,
대구 고딩들 사이에서
최고의 부의 상징이자 첨단 과학의 결정체가 등장했으니,
바로 ‘삐삐(무선호출기)’였다.
 
허리춤에 차고만 있어도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한 번 더 쳐다본다는
그 마법의 기계를 우리 5인방 중 가질 수 있는 자는
당연히 유일한 금수저, ‘프로스펙스’ 철수뿐이었다.
 
사건은 찬 바람이 부는 토요일 오후,
철수가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영롱한 청록색 삐삐를 꺼내 들며 시작되었다.
 
“야, 니들 이거 보이나?
우리 아버지가 이번 기말고사 잘 치라고 미리 사주신 끼다.
이제 내한테 연락할라카면
공중전화로 번호 찍으면 대는 거다!”
 
철수의 허세에 우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덕구의 머릿속에
또다시 엄청난 시나리오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1. 수성구 장만옥의 암호문
 
“철수야, 그럼 그 삐삐 번호... 영자한테도 알려줬나?”
 
덕구의 날카로운 질문에
철수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우리 5인방은
만화방 구석에 모여 철수의 삐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영자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던 그때,
철수의 허리춤에서 경쾌한 알람이 울렸다.
 
삐비빅- 삐비빅-
 
액정에 찍힌 숫자는 단 세 자리, ‘100’이었다.
 
“100? 이게 무슨 뜻이고?
백 원만 달라는 소린가?”
 
상구가 무심하게 단팥빵을 씹으며 말하자,
덕구가 제 발로 서서 소리쳤다.
 
“이 문둥아! 100은 ‘백 프로(100%) 너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홍콩 영화에서 장만옥이
주윤발한테 보내는 암호 같은 기라!”
 
우리는 흥분감에 휩싸여
당장 영자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동네 공중전화 부스로 전력 질주했다.


 
2. 동성로 공중전화 부스의 독수리들
 
당시 공중전화 앞은 언제나 긴 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주말 저녁 동성로의 공중전화 부스는
남고생들의 사랑과 집착이 얽힌 전쟁터였다.
 
우리 뒤로도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영자에게 멋진 암호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빠진
우리는 대기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했다.
 
“야, 이번엔 우리가 답장을 보낼 차례다.
숫자로 ‘사랑해’를 우째 쓰노?” 광팔이가 동전통을 붙잡고 고민하자,
내가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486’이다! 글자 획수가 사(4)·랑(8)·해(6)라서 486이다!”
 
철수가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경쾌하게 486을 누르려는 찰나,
늘 앞코가 터져 있던 상구의 ‘까발로’가 말썽을 부렸다.
 
좁은 전화 부스 안에서 상구가 발을 꼼지락거리다
그만 철수의 다리를 걸어버린 것이다.


 
3. 10원짜리 동전 소나기와 미친개의 등장
 
“어어? 상구야 잡으라!”
 
중심을 잃은 철수가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쓰러지면서,
그동안 우리가 판치기로 모아둔 전 재산인
10원짜리 동전 200여 개가 든 플라스틱 통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차라라라랑-!
 
좁은 부스 안은 순식간에
10원짜리 동전 소나기로 가득 찼고,
 
설상가상으로 부스 문을 거칠게 열며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학생부 ‘미친개’ 선생님이었다.
 
토요일 저녁 시내 순찰을 돌던 미친개의 레이더에
전화 부스 안에서 동전 쇼를 하던 우리 5인방이 딱 걸린 것이다.
 
“이 문둥이 자슥들!
공부는 안 하고 주말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도박판을 벌이냐! 다 일로 온나!”
 
우리는 동전을 주울 새도 없이,
터진 까발로와 시장통 나이스를 휘날리며
대구 시내 한복판을 미친 듯이 도망쳤다.


 
4. 암호의 진실과 덕구의 오열
 
미친개의 추격을 겨우 따돌리고
범어동 골목길 전신주 뒤에 숨은
우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철수의 삐삐를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그 사이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
이번에 찍힌 숫자는 ‘8282(빨리빨리)’였다.
 
“거 봐라! 영자가 지금 빨리 보고 싶다고
애타게 부르는 거 아이가!”
 
덕구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려던 그때,
 
철수가 공중전화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고 오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영자 아니다.”
“캐면 누군데?”
 
“우리 엄마란다... 시장에서 쌀 배달 왔다고 
백(100) 번 집으로 빨리빨리(8282) 오란다...
안 오면 다리 몽둥이 부란다카이...”
 
순간 골목길에는
차가운 대구의 겨울바람만이
쌩하고 불어 지나갔고,
 
주윤발을 꿈꾸던 덕구의 어깨는 처참하게 내려앉았다.


 
5. 낭만은 주머니 속 10원짜리 동전처럼
 
결국 영자의 감성적인 암호문은
철수 어머니의 살벌한 가사 노동 호출로 밝혀졌지만,
 
우리는 늘 그렇듯 배를 잡고 구르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철수야!
니 오늘 기말고사 치기도 전에 백 점(100) 맞았네!
축하한다!”
 
광팔이의 깐족거림에
철수는 청록색 삐삐를 바지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영자에게 ‘486’이라는 마음을 전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수성못 둑길을 걸으며
소방차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머니 속에서 딸랑거리는
몇 개 남지 않은 10원짜리 동전 소리가
 
마치 우리들의 서툴고 짜릿했던
청춘의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지던 밤이었다.


 
[오늘의 추억 아이템]

  • 삐삐(무선호출기) : 80년대 말~90년대 초 청춘들의 최고의 소통 수단. 숫자로만 마음을 전해야 했기에 온갖 기상천외한 숫자 암호(486, 1004, 8282 등)를 양산해 낸 낭만의 기계.
  • 공중전화 부스 : 동전이나 전화카드를 들고 줄을 서야 했던 곳. 앞사람의 통화가 길어지면 뒤에서 한숨 소리가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가장 뜨거웠던 아날로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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